부산, 바다를 품은 가마솥산

지명으로 다시 보는 대한민국
거칠산과 동래, 부산포를 지나 오늘의 부산까지

광안대교의 야경과 해안 고층 건물이 바다에 비친 부산 풍경

부산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해운대의 파도, 광안대교의 야경, 자갈치시장의 활기, 부산국제영화제의 열기, 끝없이 쌓인 컨테이너…. 아마 ‘바다’와 관계된 풍경이 대부분일 겁니다.

그런데 부산(釜山)을 한자 그대로 풀면 뜻밖에도 ‘가마솥산’입니다. 바다의 도시 이름에 바다 해(海)도, 포구 포(浦)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가마솥 부(釜)와 뫼 산(山)이 나란히 앉아 있지요.

도대체 바다의 도시는 왜 ‘가마솥산’이 되었을까요?

답을 찾으려면 부산이라는 이름이 아직 도시 전체를 가리키지 못하던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부산보다 오래된 이름 동래가 있었고, 동래의 바닷가 한쪽에는 부산포라는 작은 포구가 있었습니다.

작은 포구의 이름은 어떻게 동래를 넘어 거대한 도시 전체를 대표하게 되었을까요? 지금부터 부산 이름의 변천사를 따라, 그 이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을 살펴보겠습니다.

산비탈 주택가 너머로 부산항과 바다를 내려다본 풍경

1. 거칠산에서 동래로, 부산보다 오래된 이름

부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훨씬 전, 이 지역을 대표하던 이름은 동래였습니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거칠산국(居柒山國)이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 지역을 거칠산국의 옛 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이곳에 거칠산군을 두었고, 757년 경덕왕이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동래군(東萊郡)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동래’는 무슨 뜻일까요?

한 설에서는 동래를 ‘동쪽의 내산(萊山)’으로 풀이하고, 내산을 전설 속 신선이 산다고 여겨진 봉래산(蓬萊山)의 약칭으로 보기도 합니다.

반면 이 땅의 오래된 이름이 소리를 달리하며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독로국(瀆盧國)을 동래 지역의 옛 나라로 보고, 그 음이 ‘독로→동네→동래’로 변했다는 설입니다.

이후 행정 단위는 동래현과 동래도호부 등으로 달라졌지만, 동래라는 이름은 천 년 넘게 이 지역을 대표했습니다. 지금은 부산 안의 한 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부산보다 동래가 훨씬 큰 이름이었던 셈입니다.

독로국이란? 3세기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에 기록된 변한의 작은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지금의 부산 동래로 보는 설과 거제로 보는 설이 있습니다.

부산 이름의 변천사의 시작 동래읍성지 북문과 성벽 너머로 보이는 부산 시가지
동래읍성지 북문 주변 (출처 : 국가유산포털)

2. 동래 바닷가에 나타난 작은 이름, 부산포

동래가 지역 전체를 대표하던 때, 바닷가 한쪽에서 부산포라는 작은 이름이 나타났습니다.

현존 기록에서 ‘부산’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1402년 《태종실록》의 부산포(富山浦)입니다. 이때는 ‘부유할 부(富)’를 썼습니다. 지금과 같은 부산포(釜山浦)는 1469년 《성종실록》에서 처음 확인됩니다. 1474년 지도에도 富山 표기가 남아 있어 두 표기가 한동안 섞여 쓰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 釜山浦로 정착해 갔습니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이라는 산이 동평현에 있으며, 산의 모양이 가마솥과 같고 그 아래에 부산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산이라는 이름이 ‘가마솥을 닮은 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기록 속 부산이 오늘날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산이 처음부터 거대한 도시의 이름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큰 이름은 동래였고, 부산은 동래 바닷가에 있던 작은 포구의 이름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동래부 일대의 지형과 마을을 그린 동래고지도
동래고지도 (출처 : 국가유산포털)

3. 바다는 부산을 관문으로 만들었다

작은 포구 부산이 커진 이유는 이름 속의 ‘산’보다 이름 밖의 바다에 있었습니다.

일본과 가까운 부산포는 일찍부터 교류의 창구였습니다. 조선은 1407년 부산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두었습니다. 이후 부산포에는 해안 방어를 맡는 부산진이 자리 잡았고, 1490년에는 수군과 물자를 보호하기 위한 부산진성이 축조됐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늘 두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평온할 때는 사람과 물건,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는 길이었지만 관계가 뒤틀리면 침략군이 가장 먼저 닿는 길이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과 동래읍성은 전쟁의 첫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동래성 앞에서 왜군이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나무판에 다음과 같이 써서 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戰死易 假道難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와 군민의 항전을 그린 동래부순절도
동래부 순절도 –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4월 15일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낸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전쟁 기록화 (출처 : 국가유산포털)

바다를 통해 열린 교류의 길이 침략의 길로 바뀌는 순간, 부산은 그 충격을 가장 먼저 받아내야 했습니다. 1876년에는 일본의 무력시위 속에 맺어진 불평등조약으로 부산항이 조선에서 가장 먼저 개항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이면서 외부의 충격을 먼저 받아내야 하는 최전선. 이것이 부산을 성장시킨 힘이자 부산이 감당해야 했던 운명이었습니다.

4. 동래가 품었던 부산, 부산이 동래를 품다

개항은 부산과 동래의 관계까지 바꾸었습니다. 외국 상인과 물자가 들어오고 항만과 철도, 상점과 창고가 들어서면서 도시의 중심은 동래의 읍성에서 항구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부산은 동래의 변두리에서 근대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개항은 평등한 출발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거류지와 치외법권을 바탕으로 부산을 침투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도시가 커지기 시작한 문은 나라의 주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문이기도 했습니다.

1910년 10월 일제의 지방관제 개편으로 동래부는 부산부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산이사청도 폐지되고 그 사무는 부산부로 넘어갔습니다. 이어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해 항구 시가지는 부산부로, 옛 동래부의 일부와 기장군은 동래군으로 나누었습니다. 부산은 더 이상 동래에 딸린 포구가 아니었습니다.

선박과 항만 시설이 늘어선 1920년대 일제강점기 부산항
1920년대 일제강점기 부산항 (출처 : 부산시보, 식민지 수탈·전쟁 원조물자 싣고 내리던 항구, 세계 5위 무역항 이어 ‘세계인의 축제’ 무대로)

부산부는 1949년 부산시, 1963년 부산직할시가 되었고, 1995년 기장군을 편입하며 오늘날의 부산광역시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오랫동안 지역 전체를 대표했던 동래는 1957년 부산시의 동래구가 되었습니다.

한때 동래가 부산포를 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부산광역시가 동래를 품고 있습니다.

부산의 성장을 이보다 짧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요?

부산 이름의 변천사 연표

시대 연도 이름 의미와 변화
고대 고대 거칠산국·거칠산군 이 일대가 거칠산으로 불리던 시기이며, 신라에 편입된 뒤 거칠산군으로 정비됨
신라 757년 동래군 경덕왕 때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개칭
고려·조선 고려~조선 동래현·동래도호부 동래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이어짐
조선 1402년 부산포(富山浦) 현존 기록에서 ‘부산’이라는 이름이 처음 확인됨
1469년 부산포(釜山浦) 현재와 같은 한자 표기가 처음 확인됨
일제강점기 1910년 부산부 동래부가 부산부로 개칭되며 ‘부산’이 대표 행정구역 이름으로 자리 잡음
1914년 부산부·동래군 항구 시가지는 부산부로, 주변 지역은 동래군으로 재편됨
대한민국 1949년 부산시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됨
1957년 부산시 동래구 동래가 부산시의 한 구로 편제됨
1963년 부산직할시 정부 직할 도시로 승격됨
1995년 부산광역시 광역시로 개칭하고 기장군을 편입함

부산, 대한민국의 아픔과 희망을 품다

1950년, 나라와 사람을 품은 피란수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은 중간의 서울 환도 기간을 제외하고,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모두 1,023일 동안 피란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평지는 부족했습니다. 피란민들은 산비탈에 집을 짓고 시장에서 생계를 꾸렸습니다. 산복도로와 계단식 마을, 국제시장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낯선 도시에서 다시 살아낸 시간의 흔적입니다.

1953년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로 폐허가 된 시장 일대
1953년 1월 30일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로 폐허가 된 시장 일대 │ 출처: 국가기록원, 「부산국제시장 대화재 현장 1」(관리번호 CET0020629)
한국전쟁 피란 시기 부산 시장 골목에서 장사하고 오가는 사람들
한국전쟁 피란 시기 부산의 시장 골목과 피란민들 │ 출처: 부산광역시

1979년, 민주주의를 먼저 외친 도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시위는 시민에게 번지고 마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가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항쟁이 시작된 10월 16일은 2019년 국가기념일인 ‘부마민주항쟁 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부산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10·16 부마민주항쟁탑
부산대학교 교정의 10·16부마민주항쟁탑 │ 출처: 근현대사아카이브

항구를 넘어, 세계와 만나는 부산

오늘날 부산은 항구를 통해 세계 경제와 연결된 국제도시입니다. 부산항은 세계 2위 환적 거점항이자 2024년 컨테이너 처리량 기준 세계 7위 항만으로, ‘세계로 열린 관문’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문화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세계의 영화인과 작품이 모이고, 2014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에 선정되었습니다. 항구로 물류를 잇고 영화로 사람과 이야기를 잇는 도시, 이것이 오늘날 부산의 모습입니다.

불꽃놀이가 펼쳐진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행사장
2009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 사진: Injeongwon │ 출처: Wikimedia CommonsCC BY-SA 3.0
2025년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행사 무대에 선 영화 관계자들
2025년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행사 현장 │ 사진: Outhere505 │ 출처: Wikimedia CommonsCC BY-SA 4.0

부산의 옛 이름과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

부산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개항도시와 피란수도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시간을 만날 수 있는 다섯 곳을 골랐습니다.

1. 복천동 고분군·복천박물관 | 부산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

복천동 고분군과 박물관에서는 부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전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무덤의 구조와 출토된 토기·철기·장신구를 통해 가야 문화가 번성하고 신라에 편입되어 가던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숲으로 둘러싸인 복천박물관 건물 전경
토기와 유물을 전시한 복천박물관 전시실 내부

주소: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로 63(복천동) 복천박물관
Tel : 051-554-4263~4
https://museum.busan.go.kr/bokcheon/index

2. 동래읍성·동래부 동헌 | 부산보다 큰 이름이었던 동래

부산포가 작은 포구였던 시절, 동래는 지금의 부산 지역을 다스리던 중심지였습니다. 동래읍성의 성곽과 북문, 동래부사가 업무를 보던 동헌의 충신당을 둘러보면 한때 부산을 품었던 ‘동래’의 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래읍성의 성벽과 북문 주변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동래읍성
주소: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산48-2
전화: 051-550-6634
관람시간: 화~일요일 09:00~18:00
휴무일: 매주 월요일

동래부 동헌
주소: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

3. 부산근현대역사관 | 개항도시 부산의 성장

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는 1876년 개항부터 일제강점기, 광복과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지는 부산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동래의 포구였던 부산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항구도시로 성장한 과정을 이해하기 좋은 곳입니다.

흰색 근대 건축물로 조성된 부산근현대역사관 외관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12(대청동1가 44,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
Tel : 본관 안내데스크(051-607-8002),별관 안내데스크(051-607-8001)
휴관일 : 1월 1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때에는 공휴일의 마지막 다음날
https://www.busan.go.kr/mmch/index

4. 임시수도기념관 | 대한민국의 수도가 된 부산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정부와 국회가 옮겨온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습니다. 당시 대통령관저로 사용된 건물과 전시관을 둘러보며, 전쟁 속에서 나라의 중심 역할을 맡았던 부산의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건물

부산광역시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45(부민동3가) 임시수도기념관
Tel : 051-244-6345
휴관일 : 1월 1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https://www.busan.go.kr/monument/index

5. 국제시장·40계단·초량이바구길 | 피란민이 만든 도시 풍경

국제시장과 40계단에는 피란민들이 생계를 이어가며 살아낸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초량이바구길과 산복도로의 가파른 골목에서는 평지가 부족한 항구도시에서 사람들이 산비탈까지 삶터를 넓혀간 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산 40계단에 설치된 ‘아코디언 켜는 사람’ 조형물
40계단의 ‘아코디언 켜는 사람’ 조형물 │ 출처: 부산광역시 중구청 40계단문화관

한량아빠 추천 동선

부산을 처음 찾으면 해운대와 광안리로 발길이 향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부산은 어떻게 지금의 부산이 되었을까?”가 궁금하다면 한량아빠는 원도심을 추천합니다.

하루에 네 곳을 모두 걸어서 잇기보다 두 일정으로 나누는 편이 좋습니다. 개항 이후 부산의 성장은 ‘부산근현대역사관 → 국제시장 → 40계단’으로 걸으면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역사관에서 도시의 변화를 먼저 살펴보고, 시장과 계단에서 피란민들이 살아낸 시간을 만나는 코스입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별도 일정으로 천천히 둘러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대통령관저와 전시관을 함께 보면 부산이 피란민의 도시를 넘어 전쟁기 대한민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이 훨씬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주요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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